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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제목의 예쁜 손예진이 치매에 걸린 와이프로 주연했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자꾸 잊어서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 잊고 싶은데...
때로는 잊고 싶은데 잊히지 않아 고통받으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시카고로 이사 온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예쁜 부추꽃다발을 안겨주며 부엌에서 요리할 때 한 개씩 따먹으라던 소녀 같은 지인과 둘이서 데이트를 했습니다.
한 남편은 천국에, 한 남편은 집구석에 남겨두고,
부추꽃 먹는 법을 가르쳐준 그녀와 둘이서...

처음처럼 마지막으로 따다준 부추꽃

그녀는 나를 그녀의 최애 뷔페식당인 Golden Corral로 데리고 갑니다.
남편을 비명에 보낸 후 음식이 전혀 넘어가지 않았는데 이 식당의 야채와 과일은 넘어가져서 가끔 찾는 곳이랍니다.
그 식당은 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지낸 노스 캐롤라이나에서는 자주 갔던 곳이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이곳 시카고에선 아직 가보지 못했던(않았던) 곳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가성비 좋은 식당을 안 가봤냐고 핀잔에 핀잔을 거듭 들으면서...
오랜만의 반가운 식당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열심히 먹은 후 그녀의 정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팬데믹 때 사람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할 때에도 가끔 그녀가 가꾼 예쁜 뒤뜰에서 커피를 마시며 즐거움을 나눴던 곳입니다.

그녀가 2년 전 남편을 너무도 심한 교통사고로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기가 막히게 떠나 보내고는 오랫동안 집 밖을 나오지 않다가 최근에 정신 차리고 문을 살짝 열고 나왔는데...
이제 정신 차리고 사람들과 살아가려고 하는데...
우리의 은퇴 소식에 원망에 원망을 담아 속상해합니다.
그리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남편을 생각하며 곁들이는 말,
“남편이 곁에 있을때 잘하세요~”

꽃을 사랑하는 티를 팍팍 내는 그녀

지난 2년 사람대신 자연과 소통하면서 가꾼 그녀의 정원은 집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렇게 그녀를 위로했을 자연이 고맙습니다.
5년 전 사다 심은 복숭아 열매가 작년부터 드문드문 달리기 시작하는데,
익기 시작하니 사슴이 아낌없이 따먹더랍답니다.
사슴을 먹이느니 내가 먹는 게 더 낫겠다며 아직 더 익어야 하는 복숭아를 하나 따줍니다.

그런 그녀의 정원에 가을이 찾아옵니다.
모두에게도 찾아올 가을이...

* 잊고 싶지 않은데...
잊고 싶지 않은 현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보다 한 살 많지만 체격이 너무도 작고 동안이라 ’ 동생 같은 언니‘라며 놀리는 지인이 당신 집에 잠깐 들러 뉴욕에서 공수해 온 커피 한잔을 마시잡니다.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아 점심약속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라 은행과 우체국일을 그쪽 지점에서 처리하기로 하고 잠깐 들렀습니다.
그녀는 일찍 찾아온 류머티즘 약을 복용하면서 그 약의 부작용으로 기억력이 심하게 나빠지는 중입니다.

치매와는 다른 양상이지만 거의 치매 수준으로...
사람을 잊는 건 아니지만 전날 했던 일들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심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록을 하고 그 기록을 봐야 자신이 전날 뭘 했는지 기억되는 상태이니...
그래선지 현실보다 옛날의 기억을 자꾸 소환합니다.
어제도 나는 ’그 이야기 들었거든요’를 할 수 없어 또 한 번 그녀의 과거 이야기에 나의 기억의 횟수에 추가합니다.
잊히는 기억이 너무도 안타깝고 아쉬운 그녀...

그런 지인이 커피로 나의 발걸음을 돌린 이유는,
운동화가 너무 예뻐서 주문을 했는데 너무 커서 혹시 내 발에 맞으면 나를 주고 맞지 않으면 리턴한답니다.
이거 뭐 ‘오다가 줏었어~’ 같아서 속으로 웃으며 신어보니 내 발에 제대로 맞습니다.
내 발은 사이즈가 7이고 그녀 사이즈는 5인데...
나보고 이걸 믿으라고...
잘 떠나라는 거짓과 진실이 공존하는 선물이기에 감사히 받아왔습니다.  

나는 이 신을 신고 곧 멀리 떠날 테지만,
그녀는 나와의 좋은 추억들을 오래오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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