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디씨 홀로코스트 뮤지엄과 국립 미술관(감사 157)
이른 아침 마치 디씨에 출근이라도 하듯 697번 직행버스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집에서 그 직행버스 정류장까지 차로 5분 아니면 걸어서 25분 걸립니다.
대중교통인 연결 버스(610, 630)를 집 앞에서 타면 그것도 10분 내에 도착합니다.
걸어가려고 나섰는데 버스가 오기에 땡큐 하며 탔습니다.
그런데 이런~
출근용 막차보다 더 이른 버스(20분)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디시엔 9시보다 더 이른 8시 40분에 도착했습니다.
9시부터 개장하는 모뉴먼트 타워를 눈앞에 두고 ‘들어가 볼까?’ 싶어 온라인 예약을 하려니 당연히 내 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곁 건물에서 미리 예약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당일 티켓을 300장씩 발부한다기에 가보니 독립기념일 하루 전날이라 정오에 문을 닫으며 그래서 60장만 발부한다니 느지막이 줄을 선 내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는 건 당연합니다.
애초 계획이 없었기에 절망도 없었지만 아쉬워 타워 입구까지 가서 담당 레인저에게 혹시 예외가 있는지 찔러보니 당연히 그런 건 없다며 자기는 개인적으로 길 건너 ‘Waldorf Astoria’ 뷰가 더 좋답니다.
’ 다녀왔지! 나 못 들어가는 거 위로하는 건 아니지?’ 라며 함께 웃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보니 함께 줄을 섰던 한국 가족이 남편과 아이의 뒷모습을 아내가 찍어주고 있기에,
사진을 주로 내가 찍었던 울 아이들 어렸을 때 내 모습이 떠올라 선뜻 가족사진을 찍어 주겠노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마워하며 나를 찍어준다기에 첨엔 거절했다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주변을 맴돌다 미술관 입장시간이 되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번엔 바로 곁에 있는 ‘홀로코스트‘(Holocaust) 뮤지엄에 마음이 향해 그곳 사이트에 들어가니 바로 예약이 가능합니다.
20년 전 아이들과 함께 왔을 때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안고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섰습니다.
기본 틀은 그대로이지만 그동안 많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때는 평면이었지만 지금은 입체감이 있다고나 할까~)
홀로코트스의 비극이 있기 전엔 디아스포라로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면서 전통문화를 중시하던 평범한 유태인들의 일상이었는데...
유태인에 대한 미움이 나찌에 의해 선동적인 선전포고로 시작되면서...
그들의 문화를 태우듯 책들을 태우고...
그들의 목숨 같은 ‘토라’를 없앴으며...
심지어 히틀러의 살인행위를 반대하는 포스터를 만든 독일인 청년을 체포해 사형을 자행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독일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잔인한 행보를 시작했고...
유태인을 증오심 가득한 나치의 세력은 점점 더 확산되어 갔고...
길고 긴 터널같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남겨진 기록들이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상상하게 했고...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안네 프랭크의 이야기~
할머니 한 분이 손주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시기에 나도 곁에서 귀동냥을 했습니다.
‘상상해 봐 너 같은 소녀가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 밑의 숨겨진 방에서 12시간을 숨죽이며 지내야 했던 절박함을 ㅜㅜ’
유태인들을 고립시키던 돌벽과 철장문...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향하는 그들...
처음엔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속였다고...
그래서 알 수 없는 작은 소망을 품고 기차를 탔을 텐데...
열차 안엔 저렇게 작은 창문만이 그들의 숨구멍이었고...
죽음의 길인줄 모르고 들어선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살인 현장을 폭발하기 원했던 외부의 유태인들과 그럴 수 없었던 연합군 사이의 애고니...
그곳에서 살아남지 못했던 유태인들의 명단...
‘우리는 신발이고 마지막 증인입니다.
우리는 프라하, 파리, 암스테르담에서 온 손주들과 할아버지들의 신발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
'6백만 명이 살해된 게 아니고
한 명의 살인자가 6백만 번 살인을 했던 것임을...' 기억해주기 바라는 생존자의 절규입니다.
제2의 출애굽(배의 이름이 탈출)은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무산되어 다시 독일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던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걸 상기시켜 주는 뮤지엄에 기록을 남기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애고니를 안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마음인지 뱃속인지 모를 허기짐을 조각공원 식당을 다시 찾아 채워봅니다.
자리가 없어 연세 많은 시니어 커플과 합석을 해서 먹게 되었습니다.
80은 족히 되어 보이는 로컬분들이 당일 스미소니안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에 자원 봉사하러 나오셨답니다.
식사를 마친 그분들께는 자리를 나눠준 대가로 내가 후에 정리하겠노라고 그냥 보내 드렸고,
대신 건강에 좋지 않은 칩을 남겨주어 서로 기브엔 테이크가 되었던 현장입니다.
애고니는 공원에 남기고 국립미술관으로 향합니다.
다음 날 있을 독립기념행사에 커다란 의미가 있는 문서박물관은 준비가 완료된듯합니다.
(그 앞으로 대통령이 행차하는지 경찰차의 경호와 검고 검은 차들의 행렬이 지나갔습니다.)
전날 감상한 나머지 반쪽의 그림들을 만나러...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지금을 즐기는 예술가들...
1863년 노예 해방이 선포된 미국의 터닝포인트 시점의 아브라함 링컨과 오랜 세월 해방을 기다리던 에밀리 모틀리 할머니...
(1920년 그녀가 80세 되던 해 손자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
동관으로 이동하는데 문 닫기 15분 전이라는 안내가 나옵니다. 이런~
서관엔 르네상스부터 19세기의 작품이 있고
동관엔 피카소와 모딜리아니 등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있는데...
부지런히 들어서서 문 닫기 전 그곳에 그 작품들이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나왔어야 했습니다.
저렇게 못하고...
(피카소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뉴욕에서 보던 모딜리아니의 모델 말고 다른 모델들도 보이고...
(눈동자가 제각각이던 모델과는 다르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동관 옥상에 있는 파란 수탉을 꼭 봐야 한다기에,
올라가 보니 커다란 수탉이 반갑게 맞아줍니다.
‘이 거대한 파란 수탉은 프랑스의 국조이자 남성 권력의 상징인 ‘수탉’을 풍자적이고 유쾌하게 표현한 작품이에요.’ 챗봇의 설명을 들으며,
곧 문을 닫을 거라며 경고하는 가드에게 사진 찍어주면 나가겠노라고 애교도 부리면서...
친구 오빠 딸 내외가 애리조나에서 방문 중인데 가족식사에 조인하라고 일찍 들어오라는 친구의 말에도 양보 못하고 여전히 퇴근버스(5시 27분)를 타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