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가득한 뉴저지 헌법 공원 Constitution Park (감사 932)
이대로 가을이 오려는지 선선한 날들이 계속됩니다.
이안이를 데리고 늘 가던 공원 말고 반대쪽에 위치한 공원엘 놀러 갔습니다.
기본 문서와 민주주의, 자유, 통치의 이상을 기리는 헌법 공원이랍니다.
공원 들어서는 입구 사거리 코너에 영화사 건물이 있었다는데...
과거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영화사 건물이 불이 나서 폭발하는 바람에 소방관의 목숨을 앗아갔기에 그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6.5 에이커의 공원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비문도 있었는데 이렇게 추모시가 적혀 있습니다.

할머니는 희미해져 가는 기억에도 불구하고
기억하십니다.
그녀의 마을에서 군인을 처음 본 일을,
아직 그들을 곧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들은 문 앞에서 그녀를 한 번 슬쩍 보았을 뿐인데,
그녀가 "공장"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몇 년 후 가족을 찾을 수 없을 줄은 몰랐지만,
한 손에 보따리를 움켜쥐고 순진하게도 떨리는 마음으로 가장 좋은 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슬 같은 눈망울의 50명 소녀가 한 칸의 화차에 쑤셔 넣어졌고,
바람은 화차의 틈새로 살을 에는 듯했고,
쥐들이 그녀의 발을 쪼았습니다.
밤중에 울던 그녀들의 울음소리는 불길한 자장가였습니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면 알람이 울렸으며,
그 뒤로 쾅 닫히는 문소리에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 삐걱거리는 화차처럼 열세 살의 몸을 강제로 움직여 하루에 백여 명을 화대해야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할머니는 치를 떠셨습니다.
아, 그리고 그 사케와 담배 냄새...
그들이 떠난 후에도 그들의 냄새는 여전히 그녀의 코 끝에 남아있습니다.
전쟁으로 더러워진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남자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한국 이름,
그녀의 한국 가족...
2001년 9월 11일 폭발한 쌍둥이 빌딩의 잔재도 서 있었는데,
그때 그 일들을 수습하느라 목숨을 내어놓은 우리 동네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놀이터도 있었는데 이안이가 유일하게 탈 수 있는 아기그네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모차에서 할머니와 둘이서 놀다가 슬픔을 내려놓고 돌아왔습니다.
